피터루 대학살 Peterloo Massacre (1819)
1819년 8월 16일, 영국 맨체스터에서 피터루 대학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빈민층의 인권 요구와 정치적 변화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요인들로 이루어진 사회적 운동의 일환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피터루 대학살은 당시의 타다라이트(Tory) 정부가 빈민층인 산업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권력의 독점을 추구하며 국가 이익에 무관심하게 되는 위험한 정치적 경제 정책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건의 배경
인더스트리얼 혁명과 함께 19세기 영국은 국내외에서 공장과 제조업이 바람직한 산업을 만들어 냈고 동시에 수많은 빈민층이 생겨났다. 그러나 노동환경은 매우 열악하였고, 여론의 관심도 부족해 이러한 문제들이 경시당했다. 이에 따라 빈민층은 꼭 필요한 인권 개선과 경제적 안정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피터루 대학살 이전, 수많은 빈민층들은 인권과 공정한 대우를 요구하며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해당 정부는 빈민층의 요구를 무시하고 본인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제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에 빈민층들은 영국 국회에서 목소리를 내는 시민들의 기회를 확대하자는 요구를 했으나 이 또한 거부당했다.
그 결과, 빈민층은 더욱 극단적인 시위를 진행하게 되었다. 1819년 8월 16일, 수많은 시민들이 집회를 열려고 했지만 정부 당국은 집회 금지령과 함께 대규모 경찰력을 동원하여 시위를 억제하려 했다.
사건의 경과
피터루 대학살은 맨체스터 피터스필드(Peter's Field)에서 발생했다. 시위를 강력히 단속하려고 한 정부 당국은 군대를 파견하였고, 경찰과 군대는 인파를 몰아붙이기 위해 무기를 사용하였다.
이에 반해서 시위대는 엄청난 항의의 목소리와 함성으로 반격하였다. 항의의 대상인 정부 당국에게 폭력을 가하기 시작한 것인데 오히려 시위대에게 상대할 파워가 되었다.
피터루 대학살 당일, 경찰과 군대는 시위대에게서 화살, 칼, 총 등의 무기를 사용하여 발포하여 시위대에게 상당한 인명 피해를 입혔다. 당시 평화적인 집회로 알려진 이 행사는 극적으로 끔찍하게 끝났다. 최소한 18명의 시위대가 살해되었으며 수 백명이 다쳤다.
사건의 의미
피터루 대학살은 영국 역사상 이후 최악의 악행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 사건은 빈민층과 정부 사이의 불화를 극단으로 이끌어냈고, 이득을 추구하는 부영 층들의 타다라이트 정부에 의해 빈민층의 요구가 무시당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권리와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개혁 운동이 더욱 커져 나갔다.
피터루 대학살은 결국 당시의 정부 구조와 사회적 불평등의 불균형을 드러내고 영국에서의 인권운동을 격차지었으며, 미래의 제도 변경을 위해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된다. 사실, 이 사건은 영국의 인권과 자유를 위한 발판이 되어 나중에 차츰 훨씬 더 현명한 사회와 정치적 발전을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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